명성황후(1851~1895) 시해에 직접 가담한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 외교관이 자신의 고향 친구에게 보낸 것으로 보이는 편지가 발견되어 논란이 되고 있다.
우리가 왕비를 죽였다
2021년 11월 16일 일본 아사히신문은 을미사변 당시 조선에 영사관보로 머물던 호리구치 구마이치(1865~1945)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서한 8통을 발견했다고 전했다. 해당 편지는 시해 후 126년만에 발견된 것으로 "우리가 왕비를 죽였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고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경위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는 당시에 외교관, 경찰, 민간인 등으로 구성된 을미사변의 실행단 중 일원이었고 편지를 받은 사람은 일본 니가타 현 나카도리무라의 한학자이자, 호리구치의 친구인 다케이시 사다마쓰이다.
왕비시해가 생각보다 간단해서 오히려 놀랐다
발견된 편지에는 1894년 11월 17일부터 을미사변 이후인 1895년 10월 18일까지 쓴 것으로 총 8통이다. 이중 6번째 편지는 을미사변 다음날인 1895년 10월 9일에 쓰여졌다. "나는 진입을 담당했다. 담을 넘어 (중략) 간신히 오쿠고텐(귀족 집의 안쪽에 있는 건물, 침소)에 이르러 왕비를 시해했다"고 썼다. 또 "생각보다 간단해서 오히려 놀랐다"라고 소감을 쓰기도 했다.
해당 편지가 공개된 경위는 일본 나고야시에 사는 우표, 인지 연구가인 일본계 미국인 스티브 하세가와 씨가 고물상에서 입수한 것으로 알려진다. 붓으로 흘려 쓴 글자의 내용은 [조선 왕비 살해와 일본인]의 저자인 재일 역사학자 김문자 씨가 판독했다.
아사히 신문 측은 '편지가 원래 보관돼 있다고 여겨지는 장소나 기록된 내용, 소인, 봉인 편지를 만든 방법 등을 비춰볼 때 호리구치의 친필로 보인다'고 했다.
민간인이 아닌 일본의 국가적 차원의 범죄
김문자 씨는 "사건의 세부내용이나 가족에 관한 기술 등을 비춰봐도 호리구치 본인의 진필로 봐도 무방하다"고 했다. 이어 "현역 외교관이 임지에서 왕비 살해에 직접 관여했다고 알려지는 문면(편지에 적힌 문구, 표현에서 보이는 취지)에서 새삼 생생한 충격을 느꼈다"라고 하면서 "아직도 불명확한 점이 많은 을미사변의 세부사항을 해명하는 열쇠가 될 가치가 높은 자료"라고 했다.
이재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을미사변이 일본 국가 차원의 범죄라는 걸 입증하는 증거"라면서 "그간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대원군의 뜻을 따라 일본인 도운 것일 뿐 을미사변 당시 실행단은 일본 낭인 등의 민간이었다'라고 주장해왔다"면서 "범죄 현장에 있던 현직 외교관이 1인칭 시점으로 자신의 범행 사실을 인정한 서한이 발견된 것은 을미사변이 일본의 국가범죄라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로써 명성황후 시해가 일본의 국가적 차원의 범죄가 아니라고 했던 일본 측 주장에 대해 반박할 자료가 되고 있어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매우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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